
길을 절대 잃지 않는 숲길 가이드가 오늘은 목적지를 비워 뒀다

누구와도 박자를 맞추는 댄서가 나한테만 손을 내밀기 전에 묻는다

과녁 밖에서는 서툰 궁도 강사와 빗나간 하루를 수집한다

누구의 속도든 맞추는 러닝 페이서가 처음으로 같이 쉬자고 했다

은퇴한 전략가가 이번 팀에서는 혼자 이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백 수 앞을 읽는 바둑 고수가 다음 주 약속 앞에서는 망설인다

어려운 벽은 웃으며 오르는 클라이머, 쉬운 호감 표현은 못 한다

링크에서는 고함치는 주장, 둘만 남으면 속삭이는 남자

바다에서는 대담한 요트 선장이 육지의 약속엔 꼭 확인 전화를 한다

검 끝은 한 치도 안 흔들리는 펜싱 코치가 내 칭찬에 뒷걸음친다

인형 뒤에서만 고백하던 공연자가 처음으로 자기 얼굴을 내밀었다

영화의 색을 고치는 남자와 밤새 우리 기억의 온도를 맞춘다

모든 향을 말로 풀어내던 조향사가 우리 사이의 이름은 못 정한다

연애를 제일 잘 그리는 웹툰 작가에게 첫 데이트 자문을 맡았다

사람을 찍지 않던 풍경 사진가가 내 자리를 프레임에 남겼다

세상의 소리를 만드는 폴리 아티스트가 내 발소리에는 말을 멈춘다

안무는 한 번에 외우는 천재가 내 답장만 매번 다시 읽는다

남의 얼굴 뒤에서 살던 대역 배우가 내 영화에서는 자기 이름을 건다

금 간 그릇은 전부 살리는 도예가가 자기 마음만 폐기하려 한다

무대에서만 당당한 오페라 가수가 내 앞에서는 첫 소절을 놓친다

마지막 방송에서 끊긴 목소리가 5년 뒤 내 채널에 도착했다

장터마다 내 물건을 가로채던 라이벌이 이번엔 공동 입찰을 청했다

서로 얼굴도 몰랐던 성인 펜팔, 하필 내 원고를 반려한 번역가

늘 먼저 달려오던 친구가 이번에는 기다리는 법을 배우겠대

서로 망한 줄 알았던 옛 동업자와 빵집 셔터를 다시 올린다

친구인 줄 알았던 보드게임 점장이 연애 규칙부터 물어왔다

헤어진 뒤 같은 건물 대표가 됐다, 이번엔 대화를 미루지 않기로

해체한 밴드의 베이시스트가 고장 난 앰프와 함께 돌아왔다

내 답을 전부 틀렸다고 하던 라이벌이 마지막 빈칸을 남겼다

세 번 엇갈린 첫 동료와 막차가 끊긴 섬에서 다시 만났다

남의 이사를 완벽하게 끝내는 남자가 내 상자 하나만 못 보낸다

계약직 셰프는 메뉴보다 내가 싫어하는 맛을 먼저 외웠다

진품만 판별하는 감정사가 내 앞에서는 자꾸 거짓말을 한다

내 기획만 깨뜨리던 QA가 오류 보고서에 고백을 숨겼다

유산은 낡은 건물 하나, 집행인은 이상할 만큼 다정한 남자

한 푼도 틀리지 않는 회계사가 내 커피값만 자꾸 빼먹는다

거짓말을 파는 홍보팀장과 진실만 말하는 7일 계약

모든 흔적을 지우는 보존실장에게 지우지 못한 편지가 있다

협상 테이블의 독설가가 내 편에서는 말없이 도시락을 연다

파산까지 30일, 냉정한 총지배인이 내 이름부터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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